대상문화재
사적 제73호 김해 수로왕릉
사적 제74호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 제341호 김해 대성동고분군
사적 제75호 김해 구산동 고분군
사적 제2호 김해 봉황동 유적
사적 제429호 김해 구지봉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7호 김해오광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7호 김해향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김해 파사석탑
경상남도 기념물 제4호 김해 서상동 지석묘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82호 김해 연화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가락국(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재위 42~199)의 무덤으로, 납릉(納陵)이라고 부른다. 수로왕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전하고 있으나,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무덤의 높이는 5m의 원형 봉토무덤인데, 주위 18,000여 평이 왕릉공원으로 되어 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이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왕릉 앞 납릉정 문의 화반 위에는 석탑을 가운데 두고 2마리의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는 문양(신어상 또는 쌍어문)이 새겨져 있다. 왕릉을 보고 왼쪽에 있는 비석의 이수에는 태양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모두가 수로왕비의 나라인 인도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웅장한 스케일과 안정감 있는 배치,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건물이 인상적이다.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다. 허왕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 성이 유래되었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되어 왔다고 한다.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구지봉(龜旨峯)과 회현리 조개더미의 중간지점, 수로왕릉(首露王陵)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재 구릉의 정상 일부분을 제외한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김해시 동북쪽에 있는 분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무덤들로, 수로왕비릉에서 동북쪽으로 100∼500m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 2기의 무덤이 남아 있는데 1기는 규모가 매우 크고 다른 1기는 절반정도 남아 있는 상태이다. 무덤의 안은 관을 넣는 방(현실)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쌓아 둥글게 무덤의 형태를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현재 2기만이 확인되고 있지만, 원래는 더 많은 무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유물만으로는 무덤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무덤의 구조로 보아 김해 지방에서는 시대가 가장 늦은 무덤 중 하나로 생각된다.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많지 않은 굴식돌방무덤이면서 가야의 중심지였던 김해시내에 있어, 이 지역의 무덤을 연구하고 가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무덤들이다.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패총(조개무지). 초기 철기시대 유적으로, 높이 7m, 동서 길이 약 130m, 남북의 너비 약 30m의 낮은 언덕 위에 조성되어 있으며, 가야시대 주거지와 고상가옥, 망루, 선박 등을 복원 설치해 가야시대의 생활상을 현장감 있게 살펴볼 수 있다. 구릉의 남쪽에는 회현동의 마을이 있고, 북동쪽 낭떠러지 밑에도 민가가 들어서 있어 패각층이 드러난 단면과 구릉 위에 흩어진 흰 조개껍데기를 볼 수 있다.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지만, 1920년에 있었던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비롯하여 그 뒤 몇 차례의 학술조사를 통하여 이 유적에 대한 문화적 성격과 연대의 개요가 밝혀져서, 한국 선사시대의 유적지 중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이다. 일련의 발굴과정을 통해 이른바 김해토기(金海土器)라고 명명(命名)된 토기의 조각들이 가장 많이 나왔고, 도끼와 손칼과 같은 철기가 발견되었다.
구지봉은 서기 42년 수로왕이 탄강한 성스러운 장소이다. 구릉의 모양이 거북이를 닮았다고 하여 구수봉, 구봉 등으로 불리운다. 삼국유사 가락국에 실린 수로왕의 탄강설화에 의하면 서기42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렸던 구간과 백성들이 구지봉에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보라색줄에 매달린 황금상자가 내려왔으며. 상자에서 나온 6황금알을 깨고 태어난 분들이 6가야를 세운 왕들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구지봉이 가야500년 역사의 출발지인 동시에 고대 국문학상 중요 서사시인 "구지가"가 탄생한 곳임을 알려준다. 수로는 가장 먼저 태어났다는 뜻으로 수로왕은 태어난지 10여일만에 장성하여 가락국을 세운분으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해오광대는 남부형 민속가면극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연희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1937년 무렵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중단된 이후, 1980년대 중반 김해문화원에서 들여와 재연을 시작하여 당시 김해군 이북면(현 한림면)의 첫 공연이 연희되었으며, 보존회를 통하여 꾸준히 전승 및 연희되고 있다. 김해오광대는 모두 여섯 과장으로 첫째과장 중과장, 둘째과장 노름꾼과장, 셋째과장 양반과장, 넷째과장 영노과장, 다섯째과장 할미영감과장, 여섯째과장 사자무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대개 파계승의 풍자, 양반에 대한 조롱, 일부(一夫)대 처첩간의 삼각관계, 축사연상(逐邪延祥)의 주원(呪願) 등을 보여주고 있다. ․ 보유자 : 이명식(노름꾼1, 상여소리, 상주선산양반, 봉사), 정용근(종가양반, 영감)
조선시대 관학 교육기관으로 유학을 가르치던 곳인데 현재의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한다. 김해향교는 선조말기(1602~1604년)에 대성전이 건립되고 인조초기(1625~1629년)에 동ㆍ서무와 대성전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 향교의 주산이 무너져 숙종 14년(1688년)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동ㆍ서재를, 동 18년(1692년)에 신주를 건립하였으며 동 19년(1693년) 명륜당과 남루를 건립하여 면모를 갖추었다. 공자를 중심으로 5성위 18현의 얼을 모시고 있다. 음력 2월 초정일과 8월 초정일에 이 분들에 대한 제례를 대성전에서 지낸다.
삼국유사에 수로왕비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가야에 오기위해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 싣고 왔다고 전하는 네모진 탑이다. 현재는 6개의 석재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석재 자체에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다. 신농본초에 닭볏의 피를 찍어서 엉겨 붙는지를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전형적인 남방식 지석묘로 무덤의 주체는 땅 속에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지석묘에는 돌칼, 돌화살촉, 무문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다. 길이가 4.6m나 되는 큰 상석 위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충신의 한분인 송 빈 선생이 이곳에서 순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해 연화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은 1m 미만의 작은 불상으로 현재 김해 연화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원래는 함양 장수사에 있었던 상이며, 1715년 조각승 충옥을 비롯한 4명의 조각승 등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조각승 충옥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조각승으로서 그가 제작한 거의 마지막 단계의 작품에 해당한다. 이 불상은 충옥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점에서 조선후기 지역적 유파 연구와 조선시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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